[김지민 기자] 얼마 전까지 패션계의 트렌드는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이었다. 2000년대 중반 유럽에서 시작된 패스트 패션은 저렴한 가격과 유행을 즉각 반영한 디자인을 특징으로 내세워 급부상했다. 패스트 패션의 또 다른 특징은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이었다. 다양한 디자인의 상품을 소량으로 신속하게 생산해 제품 회전율을 높인 것이다. 기업은 빠른 상품 회전율로 재고를 최소화해 고객을 확보할 수 있고, 소비자는 유행하는 옷을 값싸게 살 수 있어 두 주체 모두에게 호응을 얻으며 시대적인 흐름을 형성했다.

그러나 저렴한 가격, 신속한 트렌드 반영, 다양한 상품으로 인기를 모은 패스트 패션에도 불편한 진실이 존재했다. 많은 상품을 싸고 빠르게 생산하기에 따르는 문제들이 적지않았던 것. 과다한 에너지 사용과 탄소 배출, 가공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해 약품 사용과 폐수, 쓰레기로 버려지는 엄청난 양의 자투리 원단 등 생산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들이 환경을 해친다는 지적이 나왔다. 또 패스트 패션 제품은 저렴한 가격 탓에 소비자들에게 ‘일회성 소모품’이란 인식을 심어주기도 했다.

출처=EBS
출처=EBS

올해 초 방영된 EBS의 하나뿐인 지구 – ‘패스트 패션이 말해주지 않는 것들’에서는 또 다른 문제를 조명했다. 패스트 패션의 가격 경쟁력이 원재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제 3세계 국가의 값싼 노동력에서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패스트 패션을 선도하는 글로벌 패션 기업이나 주요SPA(Specialty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 기획, 생산, 유통 등을 일괄적으로 맡는 의류 전문기업) 브랜드들의 생산공장은 중국이나 베트남보다도 인건비가 훨씬 싼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에 위치해 있다. 지난 2013년 4월 방글라데시 다카 인근에 위치한 라나플라자 의류봉제공장에서 건물이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해 1000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이 있었다. 패스트 패션 업체에 옷을 납품하던 이 공장의 노동자들은 불법 증축으로 지어진 건물에서 빠른 납품 날짜를 맞추기 위해 감금돼 착취당하기까지 했다.

이런 실상이 알려지면서 국제사회에는 패스트 패션에 대한 반성이 제기됐다. 이익에 따라 최종 생산물을 구매하기만 하던 소비자가 생산, 유통 과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소비자 의식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변화했고 착한 소비, 윤리적 패션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다국적 패션기업과 SPA 브랜드는 친환경 소재를 이용하거나 제3세계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등 ‘윤리적 패션’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변화하는 소비자 의식 흐름에 발맞춰 환경, 인권, 윤리를 집단의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패션 기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패스트 패션의 대안으로 슬로우 패션이 등장한 것이다. 단어 그대로 느린 속도지만 상품 뒤에 가려진 노동자의 권리와 생태 환경을 존중해 생산된 아이템을 소비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슬로우 패션을 표방하는 기업은 재생이 가능한 친환경 소재나 버려진 물건을 이용해 아이템을 생산하거나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공정한 대가를 배분하는 윤리적 기업이 대부분이다.

윤리적 패션의 원조 격인 사회적기업 ‘대지를 위한 바느질’은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세상을 지향한다는 모토 아래 쐐기풀, 옥수수, 한지 등 친환경 소재를 이용해 웨딩 드레스를 만든다. 재생종이 위에 콩기름으로 인쇄한 친환경 청첩장은 지도 부분을 떼어내 액자로도 사용이 가능하다. ‘대지를 위한 바느질’은 친환경 청첩장, 뿌리가 살아있는 부케와 유기농 케이터링 등 단순히 아이템만 생산해 내는 것이 아니라 착한 결혼식, 에코 웨딩 문화를 선도해 가고 있다. 더 나아가 친환경 유니폼, 병원복 등을 제작해 다른 기업의 사회공헌활동도 돕고 있다.

콘삭스
콘삭스

한켤레의 양말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콘삭스(Cornsox)’도 있다. 옥수수의 Corn과 양말의 Sox가 결합된 이름 처럼 자연적으로 분해되는 옥수수섬유(PLA)를 이용해 양말을 생산한다. 판매수익금의 일부는 돈이 아닌 옥수수 종자로 아프리카 옥수수농가에 기부한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콘삭스는 옥수수 종자 기부를 통해 저소득 국가들이 빈곤으로부터 자립하는데 힘을 보태고있다.

국내 최초의 공정무역 패션브랜드 ‘그루(gru)’는 의류, 패션소품, 인테리어 소품, 생활용품 등을 공정한 가격에 거래함으로써 빈곤국가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고 지속가능한 지구촌 건설에 기여한다. 서울시 우수 사회적기업으로도 선정된 그루는 ‘시민주주프로젝트’를 통해 소비자와 생산자 간 유대를 강화하고, ‘제 4세계 디자인 프로젝트’를 통해 공정무역 생산자들이 국내외 신진 디자이너와 함께 시장성있는 제품을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 외에도 에코파티메아리, 리블랭크, 오르그닷 등 다양한 사회적기업들이 환경친화적 가치관과 윤리적 가치를 기반으로 한 패션 아이템 생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내 윤리적 패션 기업의 패션 산업 점유율은 그리 높지 않다.

프라이탁
프라이탁

다른 나라는 어떨까? 스위스 재활용 가방 브랜드인 ‘프라이탁’(Freitag)은 화물용 트럭의 방수포, 버려진 안전벨트와 자전거 튜브를 원재료로 재단해 생산하는데 제품마다 각각의 고유번호를 부여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제품을 선보인다. 현재는 150여명의 직원들이 연간 40만개의 제품을 생산, 전세계 23개 국가에서 만나볼 수 있는 업사이클링(Upcycling. Upgrade와 Recycling의 합성어로 재활용품에 디자인 또는 활용도를 더해 그 가치를 높인 제품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을 말한다)의 명품 브랜드로 성장했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스웨덴의 청바지 브랜드 ‘누디진’(Nudie Jeans Co)은 100% 유기농 면을 사용한 청바지를 제작, 친환경 가치를 추구할 뿐 아니라 소비자들에게 찢고(Break in), 고치고(Repair), 재사용(Reuse)하고 재활용(Recycle)하는 4단계의 누디진 에코사이클을 자세하게 소개해 유행이 지나거나 싫증이 난 청바지를 리폼하도록 권장한다. 심지어 누디진 구매 고객을 위한 전용 수선점을 구축, 새 상품을 구매하기보다 기존에 이미 보유하고 있는 청바지를 수선해 입을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누디진은 이미 2003년에 순수익의 70% 이상을 스웨덴 바깥 국가에서 얻을 정도로 세계적인 프리미엄진 브랜드로 성장했다.

슬로우 패션의 흐름을 따르는 우리나라의 윤리적 패션기업들 역시 국내 시장을 넘어 세계로 도약해야 한다. 고유한 경영 전략과 우리만이 부여할 수 있는 브랜드 특성을 활용해 국내외 패션 산업의 점유율을 높이고 세계적인 브랜드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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