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현실정치를 반영한 드라마로 주목받았던 어셈블리(KBS, 2015.7~2015.9)에 우리 정치에서는 보기 드문 장면이 나왔었다. 주인공인 ‘국민진상’ 진상필(정재영)이 부적격자의 국무총리임명을 막기 위해 혼자 필리버스터를 벌여 국회 회의장에서 25시간에 달하는 발언을 하는 모습이었다. 정말 드라마 같은 장면이었다.

실제로 2010년의 미국 상원 전체회의장에서 비슷한 장면이 펼쳐진 적이 있다. 2010년 12월 10일, 백발의 한 의원이 9시간의 연설을 이어나갔다. 그 내용은 당시 민주당과 공화당이 합의하려는 “고소득자를 포함한 모든 계층에 대한 감세 연장”에 대한 항의. 혼자서 물만 마시며 9시간의 연설을 마친 69세의 의원, 그가 버니 샌더스다.

2016년 현재, 버니 샌더스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정치인이다. 41년에 태어나 81년에 벌링턴 시의 시장으로 당선된 후 버몬트주의 하원과 상원 의원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미국 상원의 유일한 사회주의자’이고, 그는 스스로를 민주사회주의자라 부른다. 25년 간의 무소속 정치커리어를 마감하고 민주당의 대선 경선에 나선 그는 아이오와에서의 선전에 이은 뉴햄프셔에서의 승리로 ‘바람을 일으켰다’. 그의 행보는 여러 측면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는 미국의 억만장자들로 구성된 정치자금단체인 슈퍼팩의 후원을 받지 않는 대신 250만 명의 소액기부자와 봉사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애플’의 공동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이 공개지지를 선언하기도 했다.

갑자기 유명해졌지만, 버니 샌더스는 새로운 사람이 아니고 그의 메시지는 새로운 게 아니다. 온라인 동영상 공유채널인 유튜브엔 버니 샌더스가 1985년부터 2015년까지 미국 의회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모습을 요약한 동영상이 있다. 그의 목소리는 한결 같다. ‘극심한 불평등과 고소득자의 탐욕이 지속된다면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그의 메시지가 새롭지 않은데 요즘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면, 한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최근의 바람은 버니 샌더스가 만든 것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사회가 만들고 있다는 것, 즉 미국이라는 나라의 상황이 버니 샌더스의 메시지를 필요로 하는 단계에 와있다는 것이다.

버니 샌더스의 사례는 과연 남의 일일까? 우리도 어떤 문턱에 와 있는 것 같다. 지난 대선을 달궜던 경제민주화라는 시대정신, 그리고 요즘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는 헬조선 현상. 둘은 시간차를 두고 벌어지고 있지만 같은 흐름의 두 가지 양상이다. 지금의 버니 샌더스와 2011년의 월가점령운동(Occupy Wall Street)이 시간차를 두고 벌어진 하나의 흐름인 것처럼.

지금까지는 성장이 그 자체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일종의 만능열쇠였다. 풍요의 시대라는 배경 속에서는 성장의 과실이 누구에게나 돌아간다는 낙관과 믿음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저성장의 시대다. 성장이 가능은 한지, 한정된 성장의 과실은 누구에게 어떤 원리로 배분되는 것인지가 모두에게 첨예한 관심사다. 이에 따라 갈등이 형성되거나 폭발하고 해결된다.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에게 필요한 성장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해진 시대다. 이런 질문은 지금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그 답은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요약된다.

지난 달 폐회한 다보스포럼은 기술 혁신을 통해 기후변화와 사회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며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룰 것을 고민했다. 지난 해 말엔 도쿄협약을 대체할 신 기후체제가 등장했고 UN은 새천년개발목표(MDGs)를 대체할 지속가능한개발목표(SDGs)를 제시했다. ‘지속가능한 성장’은 지구적 의제가 되었다. 선언적인 구호가 아니라 인류가 실천해야 할 목표로 지속가능한 성장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성장이 더 이상 구호가 아니어야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보여주기식 관행을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이다. 특히 기업에겐 더 중요한 문제다. 아직도 우리 기업은 보여주기에 민감하다. 다보스 포럼에서 지속가능경영기업 몇 위에 뽑혔다, 다우존스지수(DJSI)에 편입되었다는 등의 ‘가시적’ 성과가 없으면 지속가능경영은 목표를 상실해버리곤 한다. 지속가능경영에 대한 절박함보다 홍보에 열을 올리면서도 홍보성 기사에선 진정성이 최우선이라는 클리셰를 반복하니 발전이 없다. 심한 경우엔 자기 회사 내부에서 비웃음을 사기도 한다.

우리는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즉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라고 하면 대부분 기부나 사회공헌을 생각한다. 그러나 기부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다루는 여러 가지 주제 중 일부에 불과하다. 국제표준화기구가 제정한 사회적 책임에 대한 지침인 ISO26000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7개의 주제로 나누었다. 거버넌스(지배구조), 인권, 노동관행, 환경, 공정운영관행, 소비자이슈, 지역사회 참여 및 발전 등이다. 무척 어려운 개념일 수 있다. 그러나 쉽게 접근할 수도 있다.

도식적으로 보자면 우리 기업이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과 부정적 영향을 나열해보고,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고 긍정적 영향을 최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 이 일을 기업의 경영진이 나서서 해야 한다. 대개 경영자들은 자신의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잘 이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 각 기업에서 사회책임이나 지속가능경영을 담당하고 있는 실무자들을 만나보면 ‘경영진의 이해부족’과 ‘상사 설득의 어려움’이 지속가능경영의 가장 큰 난관이라고 말하곤 한다. 책임있는 경영자라면 최소한 지속가능경영을 해보겠다는 진심이라도 강도 높게 공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심상치 않다. 빈곤, 불평등, 기후변화, 사회불안정은 남의 일이 아니다.

2016년이 우리 모두에게 담대하고 뛰어난 전환의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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